잘못 쓰면 견제는커녕 '레임덕'만 가속화할 수도
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전경. 국회를 견제하기 위한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은 ‘약’이 될 수도 있으나, 자칫 잘못 쓰면 ‘독’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. 세계일보 자료사진 |
법률안 재의요구권은 흔히 ‘거부권(veto power)’으로 불린다. 헌법 53조는 “국회에서 의결된 법률안은 정부로 이송돼 15일 이내에 대통령이 공포하며, 법률안에 이의가 있을 때는 대통령이 15일 안에 이의서를 붙여 국회로 되돌려주고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”고 규정하고 있다. 여기서 국회가 통과시킨 법률안에 대한 재의를 요구한다는 게 거부권의 핵심이다. 행정·입법·사법부 간의 견제와 균형을 핵심으로 하는 대통령중심제 아래에서 거부권은 행정부가 입법부를 견제할 수 있는 ‘비장의 무기’다.
대통령이 재의를 요구하면 국회는 반드시 이를 본회의에 상정해야 한다.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의원 과반수 찬성이면 의결이 이뤄진 것으로 간주하는 통상의 안건과 달리 이 경우는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의원 3분의 2 찬성이라는 훨씬 엄격한 의결정족수를 적용한다.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법률안은 자동으로 폐기된다. 대통령의 승리요, 국회의 패배다.
하지만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의원 3분의 2 찬성이라는 조건을 충족하는 순간 해당 법안은 대통령의 의지와 상관없이 법률로 확정된다. 국회의 승리요, 대통령의 패배다.
1일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역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총 64차례로 집계된다. 이승만 전 대통령이 43회, 박정희 전 대통령이 7회, 노태우 전 대통령이 7회, 노무현 전 대통령이 6회, 이명박 전 대통령이 1회의 거부권을 각각 행사했다. 이 가운데 31차례는 대통령이 거부한 법률안을 국회가 재의결했다. 2차례는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다가 곧바로 철회했다. 결국 64회 중 절반이 넘는 33회는 대통령이 지고 국회가 이긴 셈이다. 거부권이 대통령에게 ‘양날의 칼’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.
실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국회가 자신의 측근비리를 수사할 특별검사법을 통과시키자 즉각 거부권을 행사했다. 하지만 국회는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의원 3분의 2 찬성으로 특검법안을 재의결했고, 노 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‘치명상’을 입었다. 특검법 재의결은 이듬해인 2004년 3월 국회의 노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통과를 예고하는 ‘신호탄’이었다.
이번에 박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 역대 65번째 거부권 행사가 된다. 노태우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 임기 전반부처럼 ‘여소야대’인 것도 아니고, 대통령이 속한 새누리당이 원내 과반수를 점한 ‘여대야소’ 정국에서 거부권을 행사한다는 게 비정상적인 일이긴 하다. 박 대통령의 거부권 ‘카드’가 먹혀들면 청와대와 여당의 관계에서 한동안 청와대의 우위가 유지되겠으나, 만약 실패로 끝난다면 ‘레임덕’만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.
김태훈 기자 af103@segye.com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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